1988년 한국에서 최초로 국회 청문회가 열렸다.
5공 청문회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런 청문회가 왜 노태우 정권때 열렸는지. 노태우도 같은 놈이었으면서.)
워낙 국민들의 높은 관심사였기에, TV로 생중계 되었다.

당시 학원을 안다니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하교후 돌아와도 아직 청문회가 한참 진행중이어서.
아마 당시에 회사다니던 아저씨들보다도 더 오랫동안, 자세히 청문회를 볼 수 있었다.

(내가 누누히 얘기하지만, 음악 듣기 시작하는 중학교 1학년때가 89년이었고, 그 해 마침 수많은 음악인들이 데뷔 했던 게 내가 이날 이태껏 음악을 열심히 듣는 이유인데, 또 한편 한참 비판적 사고를 시작할 무렵인 초등학교 6학년 11월에 청문회를 열심히 봤던 것이 내가 이날 이태껏 정치적으로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당시에 우리 아버지는 월간조선과 신동아를 정기구독하고 있었고, 나 역시 그 두 잡지를 열독하던 시절이다.
그리고 그때 월간조선인지, 신동아인지 별책부록으로 옥편만한 국회의원 명부가 담긴 수첩을 줬는데,
(사진, 프로필, 소속정당 들이 들어있는.) 인터넷과 PC통신이 없던 그 시절엔 정말 엄청난 정보 덩어리였다.

청문회 생중계를 보면서 나는,
핵심에 대한 질문을 하는, 똑부러지고 멋진 국회의원과 엉터리 같은 바보 국회의원을 구분하게 되었는데.
저 멋쟁이는 누구야? 저 바보는 누구야?’ 라는 생각이 들다보니,
아버지의 국회의원 명부를 찾아보면서 일일히 프로필을 검색하게 되었다.
요즘으로 따지자면, 예능프로 보다 출연진을 네이버에서 검색하거나,
야구 보면서 스카우팅 리포트 찾아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청문회를 보면서, 내가 제일 좋아했던 국회의원은 노무현이었다.
젊은 국회의원이었던 그의 질문은 정말 칼날 같았고 핵심을 바로 찝었다. 당당했다.
부산의 무명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던 가장 크게 공헌한것도 아마 88년 청문회였을 것이다.
후에도 내가 가장 지지하는 정치인이 노무현이 된 것은 당연했다.

노무현 외에도 청문회 스타는 여럿 나왔다.
그리고 공통점을 알았다. 그들은 당시 대부분 통일민주당 소속이었다.
89년도까지도 청문회는 지속되었고, 90년에 삼당합당으로 통일민주당은 민정당, 신민주 공화당과 손을 잡았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눈에 찝어두었던 사람들은 죄다 통일민주당으로 가지 않았다. 그들은 꼬마민주당으로 불리웠다.
노무현, 이기택, 김정길, 이철, 박찬종, 이부영..

그래서 90년도부터 내 지지당은 꼬마민주당이다. 꼬마민주당에서 열린우리당까지.
쭉 그래도 야권 대세를 유지해온 당이다.
20세 이후의 모든 선거에서 난 이 당 출신 후보에 투표를 날렸고, 노무현 경선 이후로는 꾸준히 후원금도 내온 당이다.


하지만, 2010년 현재의 나는 지지정당이 없다.
나는 여전히 노무현을 지지하고, 노무현 계 인사들을 지지한다.

88년 청문회 때부터 지금까지 쭉 지켜봐온 결과,
내 마음속 느낌은 경상도에서 뽑힌 한나라당 의원이나, 전라도에서 뽑힌 민주당 의원이나 도찐개찐이라는 느낌이다.
정말로 개념이, 의식이, 사고가 괜찮은 사람이 국회의원이 되는게 아니라.
그 지역에서 행세했던 사람들이 공천을 받고, 그냥 나와서, 그냥 된다.
전라도에서 뽑힌 민주당 의원들이 보다 진보적인 사람들이던가? 보통 아니더라.
그 지역 출신으로 국회의원 되기 쉬워서 민주당에서 공천을 받았을 뿐,
한나라당 옷을 입는다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더라.

그런데 지난 총선에서 진보세력이 대패 하면서,
수도권은 다 망하고, 그냥 전라도에서 뽑힌 사람들만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상한 사람들이 민주당의 패권을 장악했다. 손학규 대선후보에, 이번 선거에는 김민석 선대위원장이라니.
정치적 개념은 없고, 그냥 조직 관리 잘하는 이상한 사람들의 집단이 되었다.
결국 개념 있고 생각 있고, 심지어 인지도도 높은 사람들은 조직이 없어서 밀려나고 밀려났다.
결국 나는 민주당에 대한 정치후원금을 거두고 말았다.
그리고 민주당의 개별 정치인에게 후원할만한 사람이 없어서, 애꿎게 진보신당의 심상정을 후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민주당 주도세력이 한나라당보다 난 것은, 적어도 자기 주제는 안다는 것이다.
본인들 개개인들이 개인 승부에서 이겨낼 자신들이 없으니, 진보세력 중 대중적 인지도와 능력을 갖춘 사람들을 추대한다.

난 이 대목에서 지금 진보신당에게 몹시 실망스럽다.
민주당 후보로 나오는 한명숙, 송영길, 안희정. 누구 하나 민주당 내에 조직이 없는 사람들이다.
세력없이 홀홀단신으로 민주당에 들어가서, 여론조사와 인기도를 통해 민주당 후보 자리를 꿰찼다.
유시민도 국민참여당으로 나오지만 민주당 김진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한쪽은 사람은 없이 조직만 있고, 한쪽은 조직이 없이 사람만 있다.
선거에 이기려면 조직과 사람은 같이 가야 한다. 사람만 가지고 이기는 경우는 전혀 없다.
내가 답답한 것은 노회찬과 심상정은 왜 해보려고 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유시민처럼 붙어서 이길 생각을 왜 하지 못했냐는 것이다.
진보신당 처럼 사람만 있고, 조직은 없는 정당에서 이렇게 남의 조직을 부리고, 남의 돈을 부릴 수 있는 황금의 찬스가 어딨다고.
솔까말, 안희정/송영길보다 심상정, 노회찬이 훨씬 유명하고 유망하지 않는가? 여론조사에서도 오히려 유리했다.

지방선거는 국회의원 선거와 다르다.
지사, 시장을 뽑는 것이다. 정당으로 나와서 표 합산해서 표 대결 하는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딱 한명만 들어가서 장악하면, 다 먹을 수 있는 그런 판이다.
민주당이 진정한 진보당이 아니어서, 손 잡기 껄끄럽다 치다고 하더라도.
시정이나 도정을 하는데 민주당에서 도움 받을 거 하나 없다. 거기 들어가서 새 판을 이제부터 키우면 된다.
노무현은 뭐가 있어서 사람을 키워냈겠는가. 안희정, 유시민 다 노무현이 만든 판에서 큰 사람들이다.
서울/경기만 노리지 않았어도, 후보는 충분히 될 수 있었다. 안희정도 된 후보, 설마 노회찬과 심상정이 안될까?
그리고 울산이나 충북, 충남 같은 지역에선 당선 가능성도 충분하다.
불과 1달전에만 자력후보 내는걸 포기했어도, 한마디로 진보신당이 손해볼 게 전혀 없었다 이거다.

반면, 단독후보로 나가면 오히려 손해만 가득이다.
그래, 한명숙 유시민 둘다 되면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근데 둘중에 한명이라도 안되면, 현재 그 죄과는 다 진보신당이 뒤집어 쓰게 된다.
여권 후보와의 간격 만큼 진보신당이 득표한다면, 진보/개혁 성향 시민들이 누구를 원망하게 될지는 뻔하다.
완전히 등돌릴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진보신당이 갖고 있는 힘 마저도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득표를 적게 할 노력을 기울일 것은 아니지 않는가.

참으로 답답하고 답답하다.
판세를 놓고 볼 때, 계산할지 모르고 원리 원칙만 지키려는 모습의 진보신당은 매우 실망스럽다.
이 대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후원금 회수 밖에 없다. 그래서 심상정에 대한 후원을 끊고 한명숙으로 돌렸다.

전형적인 진보/개혁 지지 인간인 내가 생각했던 최고의 그림은 그거였다.
심상정, 노회찬이 민주당 먹는 것.
서울/경기가 아니더라도 다른 지방에서 당선됨으로 인해, 민주당 내에서 힘을 잡아버리는 것.
그래서 김민새 이런 애들 자리 못잡게 하고, 한나라당이랑 초록동색인 이상한 애들 내보내고..
그래서 좋은 사람들이 조직을 갖게 되는 그림을 원했다.
어려운 일이지만, 오죽 못나서 손학규, 김민석 영입하는 그 당에서 못할 일은 아니다.
그리고 이번 선거는 아주 절호의 찬스였다.
그래서 나도 지지정당이 생기고, 그 안에 내가 좋아하는 정치인이 있어서 정치인에도 후원할 수 있는
그런 그림을 원했다.  하지만, 다 지나간 일.

하여튼, 결론은 그것이다.

진보신당, 앞으로 힘있는 정당으로 살아 날려면.
- 단일화 하던가.
- 한명숙, 유시민이 동시에 되도록 빌어라.

그렇지 않으면, 책임을 엉뚱하게 전가하기 일쑤인 우리나라 국민들은,
한나라당에게 진다면, 그 책임을 진보신당에 떠넘길 가능성이 높다.
개혁/진보 성향의 사람들이라고 대한민국 국민의 보통사람들에 비해서 월등히 수준 높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